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빌라이 칸 (문단 편집) === 즉위 이후 === 1271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중국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나라|대원]]'''(大元)이라고 정했다. 그 김에 할아버지 [[칭기즈 칸]]을 [[태조]](太祖)에 추증했다. 아울러 아버지 [[툴루이]]는 예종(睿宗)으로 추존했고, 큰아버지들인 [[주치(몽골 제국)|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칸|오고타이]]에게도 각각 황백고(皇伯考), 황백고(皇伯考), 태종(太宗)이라는 [[제호]]를 올렸다. 사촌 [[귀위크 칸]]에게는 정종(定宗), 형인 [[몽케 칸]]에게는 헌종(憲宗)의 묘호를 올렸다. 이후 복식이나 의례도 죄다 중국식으로 바꿔 중국식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칭기즈 칸]]이나 다른 유목 제국들이 정주 민족과 엄격하게 선을 긋고 문화적으로 섞임을 꺼렸던 것과는 정반대 행위다. 당시 중국의 인구와 경제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중국을 정벌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인 듯하다. 즉위 초에는 반대파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느라 제대로 남송 정벌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 외에 상당히 오랫동안 남송 정벌을 위해 수군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등 전쟁 내내 준비 기간도 길었다. 실제로 별 수를 다 써도 양양을 공략하지 못했고, 결국 훌라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파견된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를 동원하여 겨우 점령하였다. 한편으로 그의 군대가 '''[[양양 공방전]]'''에서 일부러 힘을 보존하면서 포위전만 질질 끌어 물자를 바닥내려는 작전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투 중간중간에 중단된 적도 있으며 서로 시장을 연 적도 있고, 성 안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부녀자들을 내보내는 것을 승인하고 보호해준 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처음부터 [[몽골군]]은 많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육로 & 수로를 철저하게 봉쇄해서 상대를 말려죽이는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반면 남송 쪽은 정반대의 입장이라 어떻게든 양양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수많은 장군들이 [[몽골군]]의 포위를 뚫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들의 포위망을 뚫어 물자와 병사를 전달하곤 했다.[* 참고로 실패하면 그냥 바로 전멸이었다.] 이런 필사적인 남송군의 의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몽골군이 완벽한 포위망을 유지하지 못하게는 했지만 이것도 후반에 가서 수군을 제대로 구축한 몽골군에게 실패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쿠빌라이는 동생이 보내 준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에 힘입어 번성을 함락시키고 양양성에 마지막으로 항복 권유를 하여 양양 성주였던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냈다.[* [[여문환]]은 양양의 호족으로, 정말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하고 또 저항해서 종국에는 부녀자들을 성밖으로 내보낼 때 자기 가족들까지 내보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남송 조정에서는 이 사람이 쿠빌라이와 내통한다 이런 말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정말 버틸 수 없는 극한의 상황까지 저항하다가 항복해서 쿠빌라이에게 충성하게 된다.] 양양의 함락 뒤 남송의 방어 체계가 무너져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 영토를 차례차례 정복한다. 실제로 몽골군은 포위전을 하면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남송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전멸하고 물자를 써야 했기 때문에 몽골군의 포위 전략이 효과를 거둔 셈이다. 양양 공략에 몽골과 남송이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이곳이 남송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형주]] 문서에 나오듯이 양양을 비롯한 형주 지역은 북중국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 남송의 수도인 임안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역은 하천과 호수, 습지가 많아서 직접 공격하기엔 몽골의 기병이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고, 이 양양을 뚫어야만 순조로운 진격이 가능했다. 따라서 남송은 이곳을 반드시 막아야 했던 것이다. 1276년, 마침내 [[남송]]의 수도 임안[* 오늘날의 [[항저우시]]]를 함락해 멸망시키고 조씨 황족을 대도로 불러와 나름대로 후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잔당 세력이 [[소제(송)|어린 황자]]를 데리고 도주했다. 남송의 잔당은 홍콩 근처 애산(涯山)이라는 섬에 요새와 행궁을 짓고 자리를 잡았는데, 1279년 '''[[애산 전투]]'''를 끝으로 [[남송]]은 사라졌다. '''이로서 [[원나라]]는 순수 이민족 왕조로서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한족]]이 세운 통일 왕조로는 [[수나라]]나 [[당나라]]가 있었지만, 순수 이민족 혈통이 세운 통일 왕조는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학교, 무역항, 운하를 건설하고 과학과 예술을 지원하면서 원 제국을 크게 융성시켰다. 쿠빌라이는 [[미얀마]], [[베트남]], [[사할린]] 등을 침공했지만 완전히 점령은 못하고 형식적으로 칭신만 하게 하는 것에 그쳤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베트남]]으로의 침공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2차례의 일본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쿠빌라이와 [[일 칸국]]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다. 쿠빌라이 통치 아래 원 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에 올라, 그의 연회에는 전 세계에서 사신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몽골 제국은 끝내 나뉘었다.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 칸]]이 반(反) 쿠빌라이 세력을 규합하며 [[아리크부카]]의 계승을 선언, 쿠빌라이 칸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대란을 일으켰다. 1276년 쿠빌라이는 4남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원정을 보냈지만, 친(親) 아리크부카 장수들이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차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카이두에게 붙었다. 1277년 카이두가 카라코룸으로 진군해 오자 쿠빌라이는 명장 [[바린 바얀|바얀]]을 파견하여 카이두를 격파했다. 1287년 카이두가 [[동방 3왕가]]들과 결탁하여 또 쳐들어 오자 쿠빌라이는 먼저 [[동방 3왕가]]들을 멸망시키고, 카이두를 상대하러 갔다. 쿠빌라이가 동쪽에 있는 사이 카이두는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쿠빌라이의 본군이 오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카이두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지만 [[원나라|동]]•[[오고타이 칸국|서]] 두 칸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죽은 뒤까지도 이어졌다.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은 처음에 카이두의 오고타이 칸국에게 적대적이었지만, 1282년 카이두의 도움으로 두아가 칸에 오른 뒤 '''카이두가 죽을 때까지만''' 협력하였다.] 등이 모두 반(反) 쿠빌라이 파였기 때문에 지금의 중동 지방을 지배한 일 칸국과만 친교를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